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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현식 님

HeBhy 2007. 5. 3. 23:51

이분이 타계한 후 초등학생이 되서야 이분의 노래를 접하게 되었다. 그땐 몰랐는데, 고인의 노래가 그렇게 알려지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난 이분의 노래를 들으며, 일화를 접하며, 많은 감명을 받았었다.. 요즘 가수들은 너무 비교 되는거 같아서.. 안타깝다. 이 분은 절명하는 순간을 앞두고까지 자신의 몸보다는 노래를 위해서, 자신이 가수이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마지막까지 노래를 부르다 그렇게 가신 분이다.. 이분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삶의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도 다 아무렇지 않게 되버릴 정도의 힘을 받는 것 같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지지 않은 그.. 그 아들이 올해 가수 데뷔를 한다고 한다.(김완제 군) 한번 기대를 해보고 싶다..



1958년 1월 7일 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한 소년이 태어났다.

소년은 보성중학교에서 전교 4등을 차지할 정도로 우등생이었다.

그러나 사촌형이 선물한 기타를 배우면서 그의 인생은 일대 전기를 맞는다. 비틀스, CCR 등의 팝 음악에 빠져들었고 성적은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소년은 주먹질을 해대는 문제아로 변해 갔다.

결국 소년은 경기고 입학시험에서 떨어졌고 명지고 야간부에 들어갔다. 학교 밴드부에 가입했지만 선배의 악기를 만진 일 때문에 싸움을 벌이다 1학년도 마치지 못한 채 자퇴했다.

그 후 소년은 가수의 길을 걷는다. 밤업소를 전전하며 빨래 심부름 등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7년간의 무명생활 끝에 그는 1980년 데뷔 앨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발표한다. 비록 음반은 큰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소년의 이름은 김현식. 그는 1982년 발표한 발라드곡 ‘사랑했어요’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여대생의 우상이 됐다. TV에 거의 출연하지 않는 그가 무대에 서는 콘서트는 항상 매진이었다.

하지만 김현식의 일상은 행복하지 못했다. 결혼의 실패와 불규칙한 밤무대 활동으로 건강이 악화됐다. 그가 평소 외로움을 많이 탔고 그것을 술과 노래로 해결하려 했다는 게 주위 사람들의 얘기.

그래서일까. ‘사랑했어요’ ‘우리 처음 만난 날’ ‘떠나가 버렸네’ 등 김현식의 노래에서는 애잔한 사랑과 가슴 아픈 이별의 흔적이 묻어 있다.

1990년 11월 1일 김현식은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등졌다.

이듬해 발표된 그의 유작 앨범 ‘내 사랑 내 곁에’는 100만 장이 넘는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다. ‘내 사랑 내 곁에’에서 김현식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가래가 끓었다. 하지만 그의 혼신을 다한 열창은 이 노래를 ‘국민가요’로 만들었다.

김현식의 절친한 음악친구였던 송홍섭 씨는 “배에 복수가 찰 정도로 몸 상태가 나빴는데도 노래를 부르겠다며 마이크를 잡던 진정한 뮤지션이었다”고 회상했다.

비록 그는 갔지만 김현식의 음악은 여전히 살아 숨쉰다. 그는 진정 ‘사랑을 노래한 가객(歌客)’이었기에.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울고.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웃고…철부지 어렸을 땐 사랑을 몰라. 세월이 흐른 뒤에 사랑을 알지. 그것이 바로 사랑 사랑 사랑이야….”(김현식의 ‘사랑 사랑 사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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